| | | | |  | 주변관광지 | | | |
|  | 용장산성 | | | 고려 원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원종의 6촌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는데 고려의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1271) 의 근거지로 삼은 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38, 741척(尺),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내의 용장사지 및 왕궁터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길이는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이며 높이는 4m내외이다. | | | |  | 지정번호 : 국가지정 사적 제126호 |  | 시 대 : 고려시대 |  | 소 재 지 :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 |  | 지정연월일 : 1964년 6월 10일 |  | 면 적 : 산성 일원(6,026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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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장사 석불좌상 | | | | |
 | 이충무공 전첩비 | | | 진도읍에서 동편으로 12km 떨어진 고군면 벽파리 682-4번지에 위치한 이 비석은 1956년 11월 29일 제막식을 가졌으며, 노산 이은상선생이 글을 짓고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걸작의 글씨를 남겼다. 진도대교가 놓여지기 이전만 하더라도 진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으며, 명량해협의 길목이기도 하다.
이 비석은 진도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워졌으며,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 대한 당시의 역사(歷史)가 적혀있다. 일본 대마도를 굽어보며 장엄하게 세워진 이 비석은 가로 14m, 세로 18m의 넓이로 암석을 다듬고 석축을 쌓아 이충무공의 넋을 담고 있으며 11m의 웅장한 높이를 지니고 있다. 또 비석의 주추는 2.72m의 길이에 3.33m의 폭과 1.81m의 높이를 한 거북이는 바위를 깍아 만들어 그 등허리에 비석을 세웠다. 머리에는 쌍용이 휘감은 채 양편으로 머리를 내놓고 있는데 높이 1.21m, 가로 2.12m, 세로 1.21m로 9톤이나 되는 중량을 싣고 있다.
아침이면 햇살이 비쳐 눈이 부시고 석양이면 비석의 그림자가 바닷물까지 와닿는다.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는 이충무공전첩비는 성웅 이순신 장군의 넋을 담고 있으며, 군민들의 정성을 모아 세웠기 때문에 더 값진 의미가 담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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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진전망대 | | | 망금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대교와 주변 경관을 한눈에 볼수 있는 전망대로 등산 장비 없이 간편복으로 올라갈수 있는 전망대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경관은 경탄을 자아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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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금산 강강술래터 | |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산 3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주위가 1km이고 3정보 남짓한 넓이를 가진 조그마한 산이다. 이 산은 1597년 정유재란 음력 9월 16일 12척의 적은배로 300여척의 왜선을 격파시킨 너무나도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 3대첩의 하나인 명량해전지(울돌목)에 연접하여 울돌목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조상의 얼이 서린 해발 115m 낮으막한 산이다. 이 충무공께서는 이때 남자는 전부 전쟁터로 나가고 없으니까 갯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장시켜 이 망금산에 토성을 쌓고 산봉우리를 돌게 하면서 큰 소리로 강강술래를 부르도록 하였으니 지금도 이 산봉에는 망터가 있고 그 밑으로 강강술래 터 자리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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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찾아오시는 길 | | | |
|  | |  | 광주 ~ 진도간 직통버스 : 1일 31회 운행. 2시간 30분 | |  | 목포 ~ 진도간 직통버스 : 1일 20회 운행. 1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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