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 유 물

신안 해저유물 (두산백과)

수퍼보이 2015. 4. 25. 21:15

신안 해저유물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 바다(동경 126°05 '06 ", 북위 35°01 '15")에서 발굴된 일괄유물.

신안선에서 발견된 동전

신안선에서 발견된 동전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동전은 당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주요 수입품으로 일본상인들은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168-6)
시대 고려시대(1323년)
종류/분류 청자, 백자, 흑유, 백탁유, 잡유, 금속제품, 석제품, 목제품, 칠기, 토기, 화폐 등

발굴 장소의 수심은 20m 이상이고, 해류가 탁류를 이루면서 급하게 흐르므로 시계()가 없는 해저이다. 1976년 1월, 이곳 어부의 그물에 중국 룽취안요[]의 청자()가 인양되어 매장문화재 발견신고가 있은 후, 이해 10월부터 문화재관리국이 주축이 되어 국립박물관·서울대학교·전남대학교·문화재연구소 등으로 발굴단을 구성하고 제1차 발굴을 시작하였으며, 유물의 인양 작업은 해군의 심해잠수부가 담당하였다. 이후 1984년까지 제11차 발굴이 진행되었다.

발굴 유물은 청자·백자·흑유()·백탁유()·잡유()·금속제품·석제품()·목제품(칠기(토기() 등이며, 그 수량은 2만 8000여 점에 달하였는데, 이 중 청자가 9,600여 점으로 가장 많다. 이 유물은 침몰된 거대한 목선()에 실려 있었다. 목선의 가장 밑바닥 부분에는 동전()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1984년까지 약 20t이 인양되었다. 그리고 향목()으로 쓰거나 가구재()가 되는 자단목() 500여 점(약 8t)과 글씨를 쓴 목간() 300여 점 및 한약재()도 발굴, 인양되었다. 이들 유물은 상품()이 대부분이나, 선원들이 항해하면서 사용하던 일부 생활용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인골()의 일부도 발굴되었다. 한편, 침몰선의 선체()도 분해, 인양되었다.

청자 중에 고려청자 3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청자음각연당초문매병() 1점, 청자상감운학문대접() 1점, 청자상감연당초문잔대() 1점이다.

그밖의 청자는 중국 저장성[] 룽취안요 계통으로 원대()의 작품이 대부분이고, 송대()의 기법을 보이는 청자도 있다. 종류를 보면, 모란무늬·용무늬 등이 새겨진 화병이나 일반병이 많고, 줄무늬·용무늬·모란무늬 등이 새겨진 항아리, 무늬가 없는 소문()·정병()·대반()·주전자·대접·접시·사발·잔·향로 등이다. 특히 '사사수부 공용(使)'이라 새긴 화문()접시가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이는 원나라 지방기관인 선위사사도원수부(使)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공용품()으로 보인다.

백자는 중국 장시성[西] 징더전요[]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유약에 약간 푸른 색이 도는 청백자 계통과 흰 순백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순백자 중에는 징더전요의 추부계() 백자가 상당량 포함되어 있고 ‘복록(祿)’ 등의 글씨가 양각된 것도 있다. 종류에는 항아리·병·대접·접시·향로·주전자·잔·연적() 등이 있으며, 용무늬나 모란무늬·당초무늬가 새겨지기도 하고, 철반무늬[] 또는 철화()로 천록(鹿)이나 연꽃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원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흑유()는 천목()과 일반 흑유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천목은 허난[] 천목 계통과 유사한 것이 있고 일반 흑유는 칠흑색()·흑갈색·다갈색 등이다. 흑유의 종류는 항아리·단지·잔·사발 등이다. 백탁유 계통의 화분()이 많고 백유흑화()의 항아리와 병이 있으며, 옹기 같은 단지들이 많다.

그밖에 금속제품으로는 은으로 만든 정병()·매병()·접시 등이 있고, 청동으로 만든 촛대·향로·거울·바라(악기)·자물쇠·주전자·세발두꺼비·수저·냄비·적자()·사발 ·인물상 등 종류가 다양하다. 돌로 만든 벼루·맷돌·동물조각 및 숫돌 외에 유리제품도 있고, 나무로 만든 용기들과 도자기를 포장했던 상자 및 불상 등도 나왔다. 철기는 잔이나 발()·벼루·쟁반 등이 있고, 백동정()도 많이 인양되었다. 한약재로서 초과()·호초()·산수유·아출()·파두() 등이 있었다. 특히 동전은 오수전()을 비롯한 70여 종(·······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의 돈은 1310년에 제작된 지대통보()이다.

목간()은 물표()가 대부분인데 ‘지치 3년 6월 1일()’이라는 글씨가 나와 이 배가 침몰한 상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해는 곧 1323년에 해당한다. 선체는 10개의 격벽구간으로 구성되어 비스듬히 침몰되어 있었는데, 늑골()은 너비 67cm, 두께 52cm의 거대한 송목()이었으며, 외판()은 늑골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께 약 12cm, 너비 40∼50cm의 판재가 12판씩 크링커식으로 강한 접착제를 사용하여 접착되어 있고, 그 외부에 또 두께 1cm 정도의 보호판이 붙어 있었다. 이 배의 앞은 사다리꼴이며, 복원치의 배 너비는 약 10m, 배 길이는 30m가 넘는 큰 규모의 목선이었다.

이 유물선은 중국 푸젠성[] 푸저우[]의 조선창()에서 철저한 고증을 거쳐 당시의 기법으로 중국인들의 손에 의하여 복원되어, '700년 전의 약속'호로 명명되었다. 복원된 유물선은 길이 31m, 너비 9m, 높이 10m의 목선으로, 1996년 7월에 당시의 항로를 따라 중국의 닝보[:당시의 ]를 출발, 목포와 신안을 거쳐 일본의 하카타[]에 이르는 뱃길 3,000km를 탐사하였다.

한편, 일본 유물로서 왜 나막신(게타)·일본도()·청동거울·장기·칠기·도기 등 생활용구가 일부 인양된 것으로 보아 이 배는 당시 일본을 왕래한 중국의 무역선으로 추정되며, 1323년에 가까운 어느 시기에 침몰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방대한 규모의 해저유물들은 당시의 교역사와 동양문화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안 해저유물 [新安海底遺物] (두산백과)

 

 

신안해저유물

[ ]

[네이버 지식백과]신안해저유물 [新安海底遺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개설

1976년 봄에 이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의 그물에 걸려 수점의 중국 도자기가 인양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해 10∼11월에 걸쳐 실시된 제1차의 예비적인 조사에서 약 5,000점의 송·원대 도자기들이 발굴됨으로써 국내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발굴계획이 추진되었다.

1977년 5월 문화공보부에 의해 발굴조사단이 조직되고, 해군으로부터 51전대 소속의 함정과 해저구조대요원들로 구성된 지원단이 참가해 합동으로 유물의 인양과 해저 유적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매년 여름에 2개월 내지 4개월에 걸친 발굴이 연차적으로 계속되었다.

1982년부터는 이 유물들을 적재해온 운송선의 잔존 선체에 대한 해체인양이 병행되었다. 다음해 10월에 마지막으로 선저의 용골이 인양됨으로써 8년간 9차에 걸친 발굴조사는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내용

1) 수중발굴

그 동안에 인양된 유물의 총수는 1만 9,000여 점(동전 제외)에 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도자기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유물들은 수심 20m의 해저에서 인양되었다. 이 해역은 간만의 차가 심해 항상 4∼5노트의 조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작업은 정조시()의 30∼40분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또한 수중와도()가 높아 시계() 영()이라는 악조건 하에서 손으로 더듬어서 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한 변이 2m인 정방형을 단위구획으로 한 철제틀을 유적의 상면에 가설해 이른바 방격(, grids)조사법을 도입해서 고고학적인 방법을 최대한으로 살린 수중발굴을 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곳에는 1척의 운송선이 해저면 하에 매몰된 상태로 잔존해 있었으며, 그것은 길이 약 28m, 너비 6.9m 정도의 목선임이 판명되었다.

2) 유물의 출토 형태

유물들은 선체의 내부와 외부에 걸쳐 발견되었다. 선체 내부에 적재된 도자기들은 크기가 70㎝×70㎝×50㎝ 정도의 목제상자에 수십 개 또는 수백 개씩 정연하게 담겨서 선창에 격납되어 있었다.

한편, 목선의 갑판 이상은 이미 완전히 부식되어 그 형태를 잃고 있었다.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이 목선의 선창은 격벽()에 의해 8∼9개로 구분되어 있고, 선저()부분에는 막대한 양의 동전과 자단목() 등이 적재되어 있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이 침몰선에서 인양된 방대한 양의 물품들은 무역을 목적으로 한 상품들이었다. 목제상자 속에서 발견된 도자기들은 10개 또는 20개씩 신품을 끈으로 묶어서 포장되어 있었다.

완전한 상태로 인양된 상자의 하나에는 후추〔〕열매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상자의 외면에는 소유주를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부호와 번호 등을 먹으로 기입해놓은 것으로 보아, 복수의 하주()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3) 목선의 항해 목적

이 무역선이 항행목적지로 일본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거의 틀림없다. 그 시대에 한국에서는 우수한 고려청자를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다량의 중국도자기를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수입된 중요 품목이 도자기와 동전이었다는 사실은 일본의 문헌에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출항지로서는 인양된 동추()의 하나에 경원로()라는 지명이 새겨진 것이 발견됨으로써 오늘날 저장성()의 닝보()를 출발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4) 목선의 구조

이 무역선은 중국에서 건조된 선박임이 판명되었다. 이 목선은 조선기술상 이미 용골()과 격벽과 같은 뛰어난 구조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외판()의 연결방법으로는 이른바 클링커식이 고안되어 있다. 이 클링커식의 조선법에 대해서는 종래 외국학계에서는 북부유럽의 바이킹들이 건조한 선박 외에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러한 선구적인 조선기술의 활용으로 미뤄볼 때, 이 무역선의 중국건조설은 매우 근거 있는 것으로 믿어져왔다. 그 주장은 발굴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인양된 용골재()에서 보수공()과 그 속에서 중국동전이 발견됨으로써 확정적인 것이 되었다.

5) 선원의 구성

이 무역선이 중국에서 건조된 선박임은 틀림없겠으나, 승선한 선원단의 구성은 단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선원들의 소지품으로서는 중국식의 취사도구 외에 고려에서 사용하던 수저도 발견되었다.

또한 일본사람들만이 사용하는 목제신발과 일본장기의 말 등이 인양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은 이 무역선이 한·중·일 3국 출신의 선원들에 의해 항해되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것이다.

6) 목패

1982년부터 선저부()에 적재된 동전들을 흡인호스로 인양했을 때 적지 않은 수의 소형 목패가 함께 인양되었다. 이것들에는 동전의 수량과 구입한 시기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되는 날짜, 소유주의 이름, 그 아래에 수결()이 먹으로 쓰여져 있었다. 그 중에서 강사()라는 이름을 적은 목패가 가장 많았다. 이 이름은 중세의 중국에서 선단주와 선장을 겸한 인물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된 강수()라는 이름을 연상케 한다.

그 밖에 약간의 승려들의 이름과 함께 일반인의 이름으로서는 대개가 일본사람으로 생각되는 이름들이 발견되었다. 인명 외에 동복사()라는 절 이름을 나타낸 것이 10여 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목패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으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이 무역선의 하주들 중에는 일본사람들이 상당수 관련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강사라는 이름은 한국의 문헌에서는 절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는 승려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7) 연대

이 무역선의 시기에 대해 발굴조사단은 1310∼1330년대에 걸친 동안에 난파하였다는 견해를 주장해왔다. 그 상한연대에 대한 근거로서는 인양된 유물들 중에서 발견된 원나라의 화폐인 지원통보(, 1310년 주조)를 들 수 있다.

한편, 하한연대에 대해서는 막대한 도자기들 중에 아직 청화백자()가 출현하지 않고 있다는 미술사적 사실을 중요시하고 있다. 동양도자사에 대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청화백자의 제작은 원나라에서 133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무역선의 연대에 대해서는 중국학자들로부터 1350년대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동전들과 함께 인양된 목패들 중에 원나라의 지치() 3년(1323)의 묵서명()이 있는 것이 2점 발견됨으로써 난파연대에 대한 문제는 해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76∼1982년에 이르는 6년 동안에 인양된 유물의 내용은 [표]와 같다.

[표]신안해저유물 발굴현황

신안해저유물

구분

연도

종 류 별

기타
제1차

1976.10.26∼11. 2

52

20

2

23

-

-

-

15

112

제2차

1976.11. 9∼12. 1

1,201

421

54

9

18

12

 

169

1,884

제3차

1977. 6.27∼ 7.31

1,900

1,866

56

604

74

264

4

138

4,906

제4차

1978. 6.15∼ 8.15

2,787

1,289

96

623

63

86

11

91

5,046

 

[표] 에는 동전과 자단목의 수량이 포함되지 않았다. 동전에 대한 인양은 1982년에 실시된 흡인호스에 의한 작업 때만 하더라도 18을 넘는 많은 수량이 인양되었다.

그 중에는 당·북송·남송·요·금·서하·원의 각 시대에 주조된 50여 종의 화폐들이 포함되어 있다. 1만 6,000여 점에 달하는 도자기들은 송·원대에 제작된 중국도자기들이며, 단지 3점의 고려청자와 2점의 일본도자기가 이례적으로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들 해저유물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행될 조직적인 연구가 기대된다. 한편, 잔존선체에 대해서는 목포시에 설치된 처리장에서 과학적인 보존대책이 강구된 뒤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도록 방안이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신안해저유물자료편(新安海底遺物資料編)』 Ⅰ(문화재관리국, 1981)
  • 「신안해저유물발굴개요(新安海底遺物發掘槪要)」(이호관, 『문화재(文化財)』12, 1979)
  • 「신안해저적적발굴(新安海底蹟跡發掘)」(이호관, 『문화재(文化財)』17, 1984)
  • 「문화재발굴조사보고(文化財發掘調査報告)―신안해저유물(新安海底遺物) 제10차발굴(第10次發掘)을 중심(中心)으로―」(이호관, 『월간문화재(月刊文化財)』2호, 1984)
  • 「제8차신안해저발굴실적(第8次新安海底發掘實蹟)」(정재훈, 『한국고고학연보(韓國考古學年報)』10, 198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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