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논란으로 점철된 말년

쿠스토의 해양 탐사는 비슷한 시기인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미소 양국의
우주 탐사 열풍과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양쪽 탐사 모두 인간이 이용하고
거주할 수 있는 영역을 더욱 확장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쿠스토는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해저 주택 실험에
도전했다. 1962년에 프레콩티낭(옛 대륙)이라는 이름의 이 해저 주택에서는
두 명의 실험자가 일주일간 해저 120미터에서 생활했다. 이어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실험이 실시되어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1964년에는 쿠스토의 영화 [태양이 비치지 않는 세계]가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수상했다. 쿠스토가 이끄는 해양 연구소는 미국의 의뢰를 받고 해저
탐사정 ‘딥 스타’를 제작할 정도로 심해 탐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했지만, 훗날 우주 탐사가 그러했듯이 실용성 여부에 대한 의문은 줄곧
따라다녔다. 쿠스토는 해저 주택 ‘물거미’ 계획을 야심차게 추진했지만,
프랑스의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실용성 문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결국 이 계획은 1971년에 폐기되고 말았다.
‘물거미’ 계획이 좌초되자 쿠스토는 아예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옮기기로
작정했다. 특히 1966년부터 1968년까지는 [쿠스토의 모험 세계]라는 12부작
다큐멘터리가 ABC 방송국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다. 이 시리즈는
“다큐멘터리를 새로운 이야기 장르로 바꾸었다”는 찬사와 “과학적인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비난 속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쿠스토는 미국의
안방극장에서도 친숙한 이름과 얼굴로 부상했으며, 존 F. 케네디에서
카스트로에 이르는 세계 명사들과 연이어 만나기도 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1969년에는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 쿠스토 해양 박물관이
개관하고, 1974년에는 미국 쿠스토 협회가 설립되어서 회보를 받아보는
유료 회원이 1년 만에 1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사업은 머지않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박물관은 재정 적자로 인해 수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고,
쿠스토 협회의 본거지인 버지니아 주 노퍽 시와 제휴한 관광 복합단지 건립도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에는 쿠스토의 후계자로 공인된
둘째 아들 필리프가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사업과 관련된 논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쿠스토 선장,’ 또는 ‘캡틴 쿠스토’의
개인적인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1980년대에는 환경보호운동가들 사이에서
70대에 접어든 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였다.
쿠스토 본인도 정계 입문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깨끗이
단념하고 말았다. 78세 때인 1989년에는 30여 년간 근무한 모나코의
해양 박물관 관장 직에서 물러났지만, 대신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말년까지도 쿠스토의 삶에는 빛과 그림자가 엇갈렸다. 영광의 절정인 1989년에
파리에 개장한 쿠스토 해양 공원은 적자 누적으로 2년 만에 문을 닫았고, 미국의
쿠스토 재단은 불투명한 회계 관리로 구설수에 올랐다. 쿠스토의 사생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1990년 말에 그의 아내 시몬이 71세로 사망했다.
이듬해 여름에 쿠스토는 오랫동안 내연 관계였던 36세 연하의 프랑신
트리플레와 결혼했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십대 자녀가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노익장을 과시하던 쿠스토에게도 최후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1996년 1월 8일에 벌어진 한 가지 사건은 특히나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었다.
싱가포르 항구에 정박해 있던 그의 분신 칼립소 호가 사고로 침몰했던 것이다.
쿠스토는 칼립소 2호를 만들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지만, 그의 기력은
이미 급속하게 쇠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7년 6월 25일, 자크 이브 쿠스토는
87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관에 누운 그의 손에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빨간 모자가 들려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