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서]윤진숙 임명 강행과 바꾼 것 (경향신문 2013.04.17 21:48)
[정동에서]윤진숙 임명 강행과 바꾼 것
시쳇말로 혹시나 했으나 역시였다. 기어코 박근혜 대통령은 문제의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의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야당은 물론 여당, 국민 여론도 반대가 압도했음에도 임명을 밀어붙였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심각하게 노정된 자질 부족, 업무능력의 문제점은 도외시된 것이다. 국회와 국민 여론을 역행하면서 윤진숙 장관 임명을 강행함으로써 박 대통령은 몇 가지 중요한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잃고, 훼손했다.
첫째,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헛것으로 만들었다. 인사청문회의 우선 목적이라 할 자질과 능력 검증의 결과를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윤진숙 후보자에 대해선 자질 부족 등의 이유로 청문보고서 채택이 이뤄지지 않았다. 인사청문회에서 도덕성 문제가 아닌 자질에서의 하자로 인해, 그것도 사실상 여당의 동의 아래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은 것은 전례가 없다. 윤 후보자의 자질과 업무능력 부족에 대한 국회의 판단이 그만큼 낙제점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를 외면하고 임명을 강행함으로써 박 대통령은 인사청문회의 존립 근거를 허물었다. "쫄아서 머리가 하얘졌기 때문"이라는 변명 하나로 인사청문회의 자질 검증 작업과 결과가 통째로 무시된다면, 인사청문회는 소용이 없어진다.
둘째, 부실 인사에 대한 사과의 진정성을 내쳤다. 고위공직 후보자가 줄줄이 낙마한 인사 실패에 대해 청와대 비서실장 명의의, 소위 '17초 대독 사과' 때는 애초 진정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야당 지도부와의 청와대 만찬에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직접 사과한 것을 평가하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었다. 윤진숙 장관 임명 강행은 그 합리적 기대와 평가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결국에 민주통합당 지도부와의 만남 자리에서 이뤄진 사과는 윤진숙 장관 임명을 위한 전략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셋째, 국회와 야당과의 소통을 위한 일련의 노력과 자세를 희화화시켰다. 국정 현안에 대한 국회, 야당의 협력을 얻기 위한 박 대통령의 최근 소통행보는 적잖은 기대감을 낳은 게 사실이다. 불통과 국회 무시의 비판여론을 수용한 긍정적 변화로 비쳤기 때문이다. 윤진숙 장관 임명은 그런 소통정치의 노력과 의미를 퇴색시켰다. 야당이 "임명을 강행하면 가짜 소통이고 생색내기 소통"이라고 호소하다시피 하는데도 임명을 강행했다. 소통정치는 애초 허위의 것이었다는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민주당과의 회동은 야당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국정에 반영하려는 데 있기보다는 특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넷째, 여성 인사에 대한 오도된 메시지를 남겼다. 청와대는 당초 윤진숙 장관 후보자 지명을 '여성 인력 육성을 위한 정무적 인사'로 설명했다. 자질과 역량 부족의 논란을 덮는 데도 '여성 장관'이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정부 조각과 청와대 인사에서 드러난 '여성 홀대'의 문제가 구색 맞추기식 '여성 장관' 임명으로 해소될 리는 만무하다. 더욱이 "해녀가 더 낫겠다"는 얘기까지 나온 자질 부족의 문제를 '여성 상징성'을 내세워 무마하려 한 건 해악적이다. 여성 인력 육성의 동력이 되기는커녕 역작용을 낳기 십상이다. 윤진숙 장관 임명 강행은 '여성 대통령'의 여성 인사관, 인사철학에 큼직한 의문부호가 찍히게 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중요한 가치들을 포기하고 희생하면서까지 윤진숙 장관을 임명했다. 박 대통령은 "실력이 있다"고 자신했다. 장관으로서 자질과 업무 역량이 부족하다는 국회와 국민 여론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윤진숙 장관은 대통령이 보증한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식물장관이 될 수 있다"는 여당 원내대표의 우려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얘기"라고 반박한 게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야 할 터이다. 실력을 입증하지 못하고 장관 직무수행에서 하자가 드러나면 책임은 박 대통령의 몫이 된다. 시스템의 문제에서 비롯된 도덕성 검증의 실패가 아니라, 장관으로서 적합성과 업무수행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인사능력 자체가 심판받는 것이다. 여론에 역행하며 임명을 강행한 책임까지 더해져 국정 리더십에 심대한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이런 위험성과 책임의 문제가 있기에 윤진숙 장관 임명을 강행하는 건 '도박'이라는 우려와 비판이 제기됐던 것이다. 속된 말로 박 대통령은 인사능력과 국정 리더십이라는 엄청난 '판돈'을 걸고 윤진숙 장관을 임명했다.
결산을 내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터이다. 임명 강행을 반대하거나 우려한 국민, 여야 정치인, 여론이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진숙 장관이 그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박 대통령은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나홀로 인사' '수첩 인사'의 문제가 교정되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이 위험한 '도박'의 유일한 성과물로 위안삼아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